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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궁궐 이야기

옛 궁궐에 가면 여러 큰 건물들이 있고 그 건물들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큰 건물을 궁전이라 하고 궁전들을 둘러싸고 있는 담을 궐이라 하는데, 궁전과 궐을 합하여 궁궐이라 한다. 궁은 당시 입법·사법·행정부 즉, 주요 국가 기관들이 궁궐의 안팎에 있어 최고의 권력 기관이면서 행정 기관이었다.

궁궐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에 중궁전과 동궁전이 있다. 임금의 부인인 중전이 거쳐하는 곳을 중궁전이라 하는데 이는 중궁전이 궁궐의 한 가운데 있어서 중궁전이라 하였다. 세자가 사는 궁전을 동궁전이라고 하는데 세자는 장차 왕위에 오를 왕자로, 해가 동쪽에서 떠오름을 상징하여 궁의 동쪽에 두어 동궁전이라고 하였다. 또 조정대신이라는 말도 많이 듣는데 왕이 정사를 보던 궁전의 앞 마당을 조정이라 칭하였다. ‘전하’라는 명칭도 왕이 궁전의 아래에 있다고 하여 전하로 불렀으며, 세자를 ‘저하’라 부른 것은 우리가 큰 집을 저택이라 하는데, 큰 집의 아래에 있다고 하여 저하라고 불렀다 한다. 사극에서 왕이 업무를 보던 궁전 앞 마당에 두줄로 서 있는 신료들을 볼 수 있다. 가운데 왕이 다니는 어도가 있고 어도의 동쪽에 동반 즉, 문신들이 서고 어도의 서쪽에 서반 즉, 무신들이 나란히 섰는데 이 둘을 합하여 양반이라고 불렀다. 궁전의 지붕을 보면 추녀마루 위에 잡신을 쫒아낸다는 여러 가지 동물 모양이 서 있는데 이를 어처구니라고 한다.

조선의 궁궐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이 있다. 경복궁은 1395년(태조 4) 창건하였고, ‘경복’은 큰 복을 누린다는 의미로 정도전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경복궁에 있는 경회루는 보기에도 아름다운데 여기에서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마음을 정했고,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겼으며, 연산군 때 왕의 부적절한 행위로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기기도 한 곳이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 5)에 지어졌고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자연 친화적이고 아름다움이 세계적으로 탁월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창경궁은 1483년(성종 14)에 지어져,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 공간을 보충하는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전각이 거의 소실되었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광해군 때 다시 지었고 경복궁은 고종 때 흥선 대원군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덕수궁[경운궁]은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선조 임금이 피난에서 돌아와 정동 일대를 궁궐로 만든 곳으로 조선의 역사가 저물고 대한제국이 세워지고 일제 강점이 시작된 역사의 전환기에 있었던 궁궐이다. 경희궁은 1623년(광해군 10)에 지어졌는데, 일제 강점기에 경희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경성 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 고등학교가 자리하였다. 1980년 서울 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서울 시립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다시 지었다.

2. 조선 왕릉 이야기

조선 왕릉은 우리의 전통 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 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사 의식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 있는 문화 유산이다. 조선 왕릉은 1392년~1910년까지 조선 왕조 518년 동안의 총 27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전체 42기 가운데 북한에 있는 2기[태조의 정비 신의 왕후 한씨의 제릉, 2대 정종의 후릉]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에 있는 40기 모두가 2009년 세계 유산에 올랐고, 폐위된 2명의 왕[10대 연산군, 15대 광해군]의 무덤은 포함되지 않았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고 정비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아, 42기의 능이 어느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모든 왕릉은 한양으로부터의 거리·방위·도로 관계·주변 산세 등 왕릉의 권위와 자연 지세를 살핀 풍수지리에 의해 정해졌으며, 왕릉을 짓는 것은 국가적인 토목 사업이었다.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어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장릉[영월군]을 제외한 조선 왕릉 39기는 서울·경기 일대에 모여 있다. 왕이 왕릉에서 제사 의식을 올리기 위한 행차를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도록 거리를 생각하여 왕릉을 한양의 궁궐에서 10리[4km]∼80리[32km] 떨어진 곳에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은 왕실 문화와 정신을 알 수 있다. 또한 돌을 조각하여 만든 각종 병풍석·난간석을 비롯한 문인석·무인석·동물 조각품들은 당대의 왕실 소속 조각·건축·조경 기술자 등 최고의 장인들이 조각하여 조선 시대 왕실 미술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들이며, 27대 왕을 거치면서 설치된 석물들의 변화에서 시대에 따른 의복이나 예술성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조선 왕릉은 그들의 신분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며, 원은 왕세자·왕세자빈·임금의 아버지의 무덤으로 13기가 남아 있으며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라고 하고 64기가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왕과 왕비는 같은 묘역에 묻혔는데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의 태조·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의 단종·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선릉 옆에 있는 정릉[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의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임]의 중종은 당시 정치 상황이나 풍수 사상에 의해 왕과 왕비가 따로 묻혔다.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태릉 선수촌의 태릉은 중종의 계비인 문정 왕후의 능이다.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 왕후는 조선조 최악의 여인이었다는 평가와 정치적 파란 속에서도 중궁의 자리를 굳세게 지킨 여걸이라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으며, 많은 사극 드라마의 소재가 되기도 한 왕비이다.

3. 화성, 정조의 화성 행차 길

조선 시대 임금 중 ‘효’하면 떠오르는 왕은 누구일까? 바로 정조이다. 정조는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로 11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효심이 남달랐던 인물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뒤 사도 세자의 무덤을 화성으로 옮기고 무덤 이름을 ‘융릉’으로 높였다. 이곳에 용주사라는 절을 지어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고, 매년 찾아와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다. 용주사에 가면 ‘부모은중경’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정조의 효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죽어서도 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원했던 정조는 죽은 후에 부모님 옆에 묻혔다.

정조는 수도인 한양에 버금가는 규모로 새로운 도성을 지을 계획을 세운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팔달산 아래 정약용을 감독관으로 임명해 신도시인 화성을 건설했다. 화성이 지어진 이유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컸지만 아버지가 묻혀 있는 곳 근처로 어머니와 함께 가서 살겠다는 굳은 의지와 효성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수원에서 서울로 향하는 국도에는 ‘지지대 고개’가 나온다. 정조가 사도세자 무덤에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 고개를 넘으면 아버지의 무덤을 바라볼 수 없게 되므로 길을 멈춰서 되돌아다보며 아쉬워했었다. 그래서 정조의 행차가 늦어진다 해서 더딜 지(遲)를 두 자를 붙여 "지지대"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수원이라는 도시는 정조 임금의 효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고장이고 과학과 기술의 종합 예술인 세계 문화 유산 화성이 있는 멋진 도시이다.

4. 강릉에서 찾아보는 조선의 중앙 정치사와 향촌 사회

강원도 강릉시 지역은 신라가 하슬라주를 설치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삼국 시대 이래로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는 동안 강원도 동해안의 최고 거점 도시 역할을 해 왔다. 그러므로 많은 역사 문화유산들이 강원도 강릉시 지역에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조선 시대 중앙 정치사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고 향촌 사회의 동향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문화재들도 많다. 이 문화재들을 정치적 사건과 시대적 순서를 고려하여 살펴보자.

강원도 강릉시 지역의 문화재 가운데 먼저 '강릉 해운정(海雲亭)'과 '심언광 신도비(沈彦光 神道碑)'를 둘러보자.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의 외가쪽 친척이기도 한 김안로가 중종의 비인 문정 왕후를 폐하려고 일을 꾸미다가 사약을 받고 죽게 되고, 심언광은 김안로를 추천했다고 하여 관직에서 쫓겨나 향촌으로 돌아오게 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심언광을 통하여, 김안로·윤임 일파[대윤(大尹)이라 불림]와 문정 왕후·윤원형 형제 일파[소윤(小尹)이라 불림]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정치 다툼인 을사사화를 비롯하여 앞서 발생하였던 중종반정과 조광조의 개혁 정치, 기묘사화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훗날 강릉의 심언광 후손들은 송시열의 노론과 연결되어 정치적 권력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 다툼을 피하여 '임경당(臨鏡堂)'[김열의 호이자 그의 별당 이름] 김열의 아버지 김광헌처럼 대과[문과] 응시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나오는 향촌 사회의 분위기도 형성된다.

이후 선조 대에 와서 사림들이 정권을 잡고 나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는 상황에서 율곡 이이가 당파 싸움과 정치 다툼을 조정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결국 동인의 공격을 받으면서 이이도 서인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그런데 이이의 외가가 강릉인 까닭에 이이는 어려서는 물론이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강릉에 자주 머물면서 강릉 지역 사림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그와 관련된 문화재가 '강릉 오죽헌(烏竹軒)'이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대에는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이때 허균은 이이첨으로 대표되는 북인 정권의 요구대로 영창 대군의 어머니인 인목 대비를 대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앞장서서 주장하다가 역모죄로 처형당한다.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강릉 '애일당(愛日堂) 터'와 '강릉 이광로 가옥'이다. 허균은 어머니가 조선 중종 때 예조 참판을 지냈던 김광철의 딸인 까닭에 강릉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자주 강릉을 찾았다.

숙종 대에는 송시열이 사약을 받아 죽고 노론이 쫓겨나는 기사환국이 일어난다. 이와 관련하여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의 '정선 이종후 가옥'과 별당인 수고당(守孤堂)이 또한 강원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정조 대에는 정조를 가장 가까이에서 받들던 홍국영이 유배되어 왔던 '강릉 김윤기 가옥'이 있으며, 정조의 개혁 정치와 친위 세력 구축을 비판하다가 죽은 이택징을 모신 '자호재 영당(自好齋 影堂)'도 있다.

이러한 중앙 정치사의 전개와 함께 강릉 지역 향촌 사림들의 정치적 동향은 공자를 모시는 '오봉 서원(五峯 書院)'의 건립과 모신 인물의 변화 과정, 율곡 이이를 모시는 '송담 서원(松潭 書院)'의 창건과 사액 과정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오봉 서원은 전국에서 일곱 번째이자 강원도 최초로 건립된 서원으로, 강릉 지역 사림들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이후에는 주자를 모시고 다시 송시열을 추가하여 모시는 과정에서 강릉 지역의 사림도 중앙 정치계와 연동하여 점차 노론계가 주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강릉 지역의 조선 시대 건축물인 전통 가옥과 서원·사우들은 조선의 중앙 정치사와 관련된 유물·유적이면서 역사 속의 인물들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큰 가치와 의미가 있다. 역사 교육의 생생한 현장인 것이다.

이 유적들을 시대순과 위치를 고려하여 답사하려면 ① 강릉 해운정 ② 심언광 신도비 ③ 강릉 오죽헌 ④ 강릉 이광로 가옥[허난설헌 생가] ⑤ 애일당 터[허균 시비] ⑥ 송담 서원 ⑦ 강릉 김윤기 가옥[홍국영] ⑧ 자호재 영당[이택징] ⑨ 임경당[김열] ⑩ 오봉 서원 ⑪ 정선 이종후 가옥과 수고당 순서로 가 보기를 권한다.

5. 웅진 사비 시대, 백제의 문화를 다시 일으키다

[백제의 중흥과 멸망을 지켜본 세종특별자치시·대전광역시·충청남도]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수도인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충청남도 공주시]으로 옮겼다. 그 후 웅진에서는 무령왕이, 사비[충청남도 부여군]에서는 성왕이 노력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의 연합군을 막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였다. 이때 세종특별자치시·대전광역시·충청남도 지역은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을 막으며 백제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로서도 큰 역할을 해냈다.

[백제의 수도에서 만나는 품격 높은 아름다움, 공주와 부여]
충청남도 부여군과 충청남도 공주군은 한성에 이어 백제의 발전과 멸망을 함께 한 왕도이다. 따라서 공주의 무령왕릉과 공주 공산성, 부여 능산리 무덤군과 부여 부소산성, 국립 공주 박물관과 국립 부여 박물관 등은 백제의 수도에서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볼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다.

[백제 문화의 다양한 멋, 불상과 산성]
세종특별자치시·대전광역시·충청남도 지역의 불상과 산성에는 다양한 백제의 아름다움이 있다. 백제의 미소를 볼 수 있는 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과 태안 동문리 마애 삼존불 입상, 백제 유민의 마지막 소원을 담은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이 나온 세종특별자치시 비암사, 백제와 신라의 치열했던 전쟁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대전광역시 보문산성과 계족산성 등에서 백제 문화의 다양한 멋을 찾아볼 수 있다.

[백제 문화의 잔잔한 여운, 멸망과 부흥 운동]
백제의 중흥과 멸망을 함께 한 곳, 그래서 세종특별자치시·대전광역시·충청남도 지역에는 백제 문화의 여운이 있다. 백제의 멸망을 다시 새겨보는 충청남도 서천군의 기벌포와 충청남도 논산시의 황산벌 전적지, 백제의 부흥 운동을 이끈 각 지역의 산성들, 백제의 지방 문화가 깃든 충청남도 홍성군의 홍주성 역사관과 충청남도 천안시의 천안 박물관 등에서 백제 문화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6. 고려 시대, 지방 문화가 발전하다

[고려 시대에 토속적인 지방 문화가 발전했던 세종특별자치시·대전광역시·충청남도]
삼국 시대와 달리 고려 시대에는 지방 세력이 문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이에 지방 문화가 발달하고 문화의 내용도 보다 다양해졌다.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대전광역시·충청남도 지역에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크게 만든 불상과 백제 탑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을 닮은 탑들이 많다.

[크게 크게 더 크게,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불상]
세종특별자치시·대전광역시·충청남도 지역에는 고려 시대에 만든 것으로 알려진 불상이 많다. 아울러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불상들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돌로 만든 불상의 높이가 사람 키보다 훨씬 높다.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은 높이가 18m에 이른다. 둘째, 불상의 얼굴이 몸체에 비해 큰 편이다. 셋째, 대체로 불상의 몸이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느낌을 준다. 넷째, 옷의 표현이 두껍게 조각되었다.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불상은 대전광역시 유성의 석조 보살 입상, 논산 개태사지 석조 여래 삼존 입상, 부여 대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예산 삽교읍 석조 보살 입상, 당진 안국사지 석조 여래 삼존 입상, 아산 평촌리 석조 약사여래 입상, 홍성 상하리 미륵불과 홍성 신경리 마애 여래 입상 등이 있으며, 세종특별자치시 연동의 송용리 마애 여래 입상도 이와 비슷하다.

[닮은꼴을 찾아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닮은 석탑들]
고려시대의 석탑은 대체로 옛 백제와 신라의 석탑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공통점이 있다. 세종특별자치시·대전광역시·충청남도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석탑은 부여 무량사 오층 석탑, 부여 장하리 삼층 석탑, 공주 청량사지 오층 석탑, 충청남도 서천군의 성북리 오층 석탑 등이 있다. 이와 함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의 비암사 삼층 석탑은 지붕돌의 처마 끝이 위로 크게 들어 올라간 모습이 백제 탑의 특징을 보여준다.

7. 서원, 조선 선비 문화의 중심에 서다

[조선 시대 선비 문화를 꽃피웠던 세종특별자치시·대전광역시·충청남도]
세종특별자치시·대전광역시·충청남도 지역에는 지금도 많은 서원이 있다. 서원은 지방의 학문적인 특성과 선비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직접 서원에 가서 보고 듣고 조사하면서 서원에서 모셨던 성인이나 유학자에 대해 알아보는 일은 참 흥미롭다.

[서원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선비 문화 여행]
선비는 성리학적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들로 조선 사회를 이끌었던 사림과도 통한다. 세종특별자치시·대전광역시·충청남도 지역은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아 예학과 의리학으로 꽃을 피웠던 성리학인 기호학파의 중심지였다. 충청도의 기호학파는 호서학파라고도 한다. 호서학파는 김장생 이후 송시열·권상하·한원진·이간·김창협·김원행 등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의 중앙 정치계를 이끌었다.
한편 이 시기에 호서 지역에도 많은 서원이 세워졌다. 충청남도 논산시의 돈암 서원과 노강 서원, 충청남도 금산군의 용강 서원, 충청남도 공주시의 충현 서원, 충청남도 부여군의 창강 서원, 충청남도 서천군의 문헌 서원, 세종특별자치시의 합호 서원, 대전광역시의 도산 서원과 숭현 서원 등은 대표적인 서원이다.

[하나 더, 지역별로 챙겨 보는 호서 지역의 선비 문화]
충청남도·충청북도를 합친 호서 지역의 서원은 학문적으로는 기호학파이고, 사림의 당파로는 서인[조선 선조 때 심의겸을 중심으로 동인과 대립한 당파]과 관련이 많다. 그러나 숙종 때 윤증과 송시열이 서로를 헐뜯었던 사건인 '회니시비'를 거치면서 이곳의 서원은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을 지지하는 두 세력으로 갈라졌다. 이어진 호락논쟁[조선 후기 성리학에서 인성과 물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놓고 벌어진 논쟁으로, 다르다는 호론과 같다는 낙론으로 나뉘었다]에서는 낙론의 서울 지역에 맞서 호론을 지지하였다.
특히 호론의 대표 주자였던 한원진이 살았던 홍주[현 충청남도 홍성군]의 유생들은 한원진의 학문과 사상을 위정척사론으로 발전시키고, 을미사변과 을사늑약이 있었을 때 홍주 의병을 일으키는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시간과 여유를 갖고 서원을 찾아 조선 시대의 선비 문화 여행을 해 보자.

8. 충북의 산성

우리나라의 산성은 다른 나라의 산성과 뚜렷이 구분된다. 먼저 평지성[평지에 둘러쌓은 성. 고구려의 요동성, 발해의 상경 용천부가 이에 속한다]과 산성으로 나누어 쌓았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산성의 입지로 방어 시설 기능을 중시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산성의 입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고, 적의 공격을 막아 내기 쉬운 지리적 요충지[지세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를 중요하게 여겼다.

우리나라의 산성은 다른 나라의 성들과 달리 평지성과 산성을 같이 축조하였다. 이렇게 평지성과 산성을 모두 쌓은 것은 관할 내의 모든 백성과 운명을 같이 하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청북도 지역은 삼국의 힘이 서로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간의 영토 확장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격전의 주 무대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죽령, 계립령, 추풍령 등의 주요 고갯길의 길목이나 남한강,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발달된 교통로의 주요 거점 지역에는 성곽의 축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때 축조된 성곽은 대개 하천이나 평야 지대를 끼고 있는 구릉성 산지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전국의 1,000여 개로 추정되는 성 중 충북 지역에 있는 산성은 100여 개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 시대 단양의 온달산성과 적성, 보은의 삼년산성, 충주의 장미산성 등 많은 산성이 축조되어 대부분 고려 시대까지 사용되었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면 그 기능을 잃은 곳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청주의 상당산성처럼 조선 시대에 와서 오히려 그 기능이 커진 산성도 있다.

삼국 시대에 주로 군사적 기능에서 설치되던 산성은 주변 지역이 군사적으로 안정되면서 행정적 사무를 맡아 보는 기관으로 변화되었다. 이와같이 충청북도 각 지역에 만들어진 수많은 산성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을 펼쳤던 역사를 묵묵히 말해주고 있다.

충청북도 각 지역에 만들어진 수많은 산성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을 펼쳤던 역사를 묵묵히 말해 주고 있다.

9. 가야국 이야기

가야국은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12부족의 연맹체를 통합하여 김수로왕의 형제들이 세운 여섯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경상남도 김해의 기름진 삼각주 위에 약 2,000년 전 수로왕은 가야국을 건설하여 신라에 합병되기까지 무려 약 500년 동안 찬란한 가야 문화를 꽃피웠다. 경상남도 김해는 가야 유적의 전시장이라고 할 만큼 많은 고대 문화의 유물과 유적들이 남아 있다.

김해 봉황동 유적의 조개더미에서는 각종 생활 도구와 식생활과 관련한 불에 탄 쌀, 동물 뼈, 조개껍데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 풍습과 자연환경 등의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발견된 각종 유물들은 김해 봉황동 유적 안에 있는 패총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봉황대 공원에서 서북쪽으로 가면 김해 수로왕릉이 있다. 경산남도 김해의 상징적 문화 유적인 김해 수로왕릉은 가야국을 창건한 수로왕을 모신 능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199년에 158세로 수로왕이 죽자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 1장의 빈궁[상여가 나갈 때까지 관을 두던 곳]을 짓고, 장사를 지낸 후 주위 300보를 '수로왕묘'라 하였다고 전한다.

김해 수로왕릉에서 왼쪽으로 수릉원을 지나면 가야 왕들의 묘역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이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우리나라 고대 무덤 형식의 변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중국제 거울이나 토기류에서 한국·중국·일본의 문화 교류 상황을 밝혀주는 중요한 곳이다.

다음으로 북쪽에 있는 구지봉 공원 반대편에는 김해 수로왕비릉이 있다. 가야국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인 허왕후의 왕비릉이다. 인도 야유타국의 공주인 허왕후의 등장은 앞선 철기 문화로 세계와 교류했다는 가야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대가락국의 건국 설화가 깃든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의 구지봉 기슭에 자리 잡은 국립 김해 박물관은 고대 국가의 하나인 가야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하기 위해 지어졌다. 가야의 역사는 다른 고대 국가들에 비해 역사 기록으로 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가야의 실체는 대부분 발굴 조사 등의 고고학적 방법으로 찾아진 것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립 김해 박물관은 다른 국립 박물관들과 달리 고고학 중심의 전문 박물관으로 특성화되어 있다.

10. 근현대 부산이야기

부산광역시는 조선 후기 유일한 대일 교류 창구로서 왜관이 설치되었고,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되면서 국제 무역항이자 근대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부산광역시 중구를 중심으로 부산의 역사를 잘 보여 주는 여러 유적들을 살펴보자.

먼저 부산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는 부산 박물관으로 가보자. 부산 박물관은 1978년에 개관하여 발굴 조사와 연구 그리고 시민들의 부산 지역 문화에 대한 이해 증진을 위해 전시와 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다.

다음으로 부산광역시 중구로 이동하면, 1호선 중앙역 근처에는 독립운동가인 백산 안희제의 기념관이 있다. 안희제가 세운 백산 상회 터에 건립하였는데, 백산 상회[후에 백산 무역 주식회사]는 상해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백산 기념관은 작은 규모의 기념관으로 지하1층과 지하 2층으로 되어 있다.

백산 기념관 서쪽으로는 용두산 공원이 있다. 용두산 공원은 일제 강점기 동안에 일본인들이 용두산 정상에 용두산 신사를 세워 일본과 조선을 오가는 선박의 무사 항해를 빌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1916년에 근대적인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현재 용두산 공원의 시설물로는 척화비·충혼탑·4 ·19 의거 기념탑·이 충무공 동상·팔각정·시민의 종 등이 있다. 용두산 공원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부산의 상징인 부산 타워는 높이 120m이며, 1973년에 세워졌다.

용두산 공원에서 북서쪽으로 내려오면 부산 근대 역사관이 있다.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적 수탈 기관이었던 동양 척식 주식회사 부산 지점으로, 일제 강점기인 1920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1949년부터 1999년까지 부산 미문화원으로 사용되어 외세 지배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 근현대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건축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부산 근대 역사관에서 대청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보수동 책방 골목이 나온다. 6.25 전쟁 후 북에서 피난 온 송정린 부부가 좌판에서 미군 잡지를 팔면서부터 보수동 책방 골목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60년~1970년 대에는 70여 점포가 들어서 문화의 골목 부산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에 와서는 보수동 책방 골목 축제를 열어 도서 무료 교환, 고서 전시회, 불우 이웃 돕기 등 행사를 거쳐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2005년부터 보수동 문화 축제가 열리고 있다.

11. 선사 시대 사람들이 남긴 흔적 '바위그림'

울산광역시 울주군에는 우리나라 선사 시대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유적 2곳이 있다. 바로 국보 제147호인 울주 천전리 각석과 국보 제285호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이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의 바위에는 선사 시대 사람들이 그려 놓은 고래와 사슴 같은 동물, 동그라미? 마름모? 물결 같은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있어 울산광역시의 화려했던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그림의 종류로는 사슴과 순록이 가장 많다.

한편 울산 천전리 각석에는 또 다른 부류의 그림이 있다. 신라 화랑들이 찾아와 암벽에 새겨 놓고 간 글씨와 그림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림은 귀족 행렬도와 말을 탄 행렬과 배·사람과 용과 새 등이며, 글씨는 그림 사이에 새겨지거나 그림 위에 덧새겨져 있다.

울산 천전리 각석을 가장 잘 볼수 있는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오전 10시에서 11시 무렵이라고 한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서 대곡천을 따라 2㎞ 정도 내려와 반구대를 지나 더 아래에 있는 '건너 각단'이라고 하는 바위 절벽에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 말부터 청동기 시대에 새겨진 바위그림이다. 대부분이 동물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곳곳에 고기를 잡거나 사냥하는 사람의 모습도 보여 선사 시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그중에서 선으로 그려진 인물상은 가장 오래된 우리 조상의 얼굴이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평시에는 사연댐 물속에 잠겨 있어 볼 수가 없다. 댐의 물이 줄어드는 늦가을이나 초봄, 또는 가뭄 때나 볼 수 있으며 시간상으로는 오후 3시 반 이후부터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반드시 울산광역시 문화 관광과에 문의하는 것이 좋다.

한편 반구대는 반계 서원에서 건너다보이는 곳에 있는 마치 물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거북처럼 생긴 언덕이다. 반구대에는 정몽주의 유허비가 서 있는데, 비를 세운 비각이 있는 자리가 거북의 등, 물가 쪽으로 불거진 앞쪽이 거북의 머리에 해당한다. 반구대 곳곳에는 정몽주, 이언적, 정구 등 옛 시인 묵객들이 남긴 글씨와 그림 등이 남아 있다.

12. 골목을 걸으며 만나는 대구의 근현대

대구광역시 중구에는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근대 건축물을 만날 수 있는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펼쳐져 있어 옛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골목 답사의 출발은 대구광역시 읍성의 남문인 영남 제일관과 종각이 있던 종로부터 시작된다. 종로는 1905년부터 자리 잡았던 화교들의 거주지이기도 하다. 그 옆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이 진골목이다. 진골목 중간에는 대구광역시 최초의 서양식 2층 주택인 ‘정소아과 의원’이 있다. 진골목을 나오면 부산광역시에서 서울로 가던 영남 대로변에 펼쳐진 약전 골목으로 이어진다.

한약재의 향을 온몸으로 느끼며 조금만 걷다보면 담쟁이로 둘러싸인 ‘제일 교회’의 고딕식 예배당 첨탑이 눈에 들어온다. 1893년 대구 경상북도 지역 최초의 남성정 교회로 시작, 1997년 동산 청라 언덕으로 이전하여 주일 예배 때만 개방하고 있다. 제일 교회를 둘러본 후 예술가 골목의 이상화, 서상돈 고택으로 향한다. 시인 이상화와 국채 보상 운동 제안자인 서상돈의 고택은, 도심지 개발 열풍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고택을 나와 청라 언덕 방향으로 향하면 서울의 명동 성당, 전주의 전동 성당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성당 중의 하나인 ‘계산 성당’이 보인다. 1899년 한옥식 기와 건물로 지었지만 화재로 인해 1902년 서양식으로 다시 지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한복 입고 갓을 쓴 천주교인들이 그려진 ‘우리식’ 스테인드글라스를 볼 수 있다. 맞은편으로 길을 건너면 ‘대구의 몽마르트르’라 불리는 90개의 계단과 마주한다. 대구광역시 출신 작곡가 박태준의 「동무 생각」에 등장하는 ‘청라 언덕’으로 오르는 아름다운 계단이지만, 1919년 3월 8일 만세 운동에 참여한 어린 학생들이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몰래 이동한 곳이기도 하다. 계단을 오르면 새로 지은 제일 교회와 1910년경에 지어진 3채의 스윗즈, 챔니스, 블레어 미국 선교사 주택이 푸른 담쟁이 넝쿨에 둘러 싸여 각각 선교, 의료, 교육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13. 경주 남산에 깃든 신라인의 의지

2000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남산은 신라의 흥망성쇠를 담고 있는 노천 박물관이다. 신라인들은 남산 전체에 불상과 탑을 쌓아 불국토의 이상 세계를 구현함으로써 신라 전 국토가 부처의 보호 아래 펼쳐진 세상이며, 신라 국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을 확립하였다.

경주 남산 답사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깃든 경주 나정에서 시작하여 동남산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우리나라에서 바위를 깎아 굴 형태의 공간을 만들면서 불상을 새긴 유일한 예이자, 남산 불교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인 경주 남산 불곡 마애 여래 좌상, 신라를 불국토로 만들고자 했던 명랑 스님의 의지로 만들어진 경주 남산 탑곡 마애 불상군, 남산에 남아 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인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 여래 좌상을 차례로 둘러보자.

그리고 사금갑 전설을 간직한 경주 서출지 곁의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 석탑을 지나 동남산의 가장 깊은 골짜기인 봉화곡 돌계단 142개를 밟고 올라서면 칠불암에 이른다. 칠불암 뒤의 산 정상 절벽 면에 새겨진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 보살 반가상 앞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이 소나무 숲 아래로 보이고, 보살상과 같이 하늘에 떠 있는 느낌이다.

신선암을 지나 조선 세조 때 생육신인 김시습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지은 용장사를 찾아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 석탑,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 여래 좌상, 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 여래 좌상을 돌아본다.

하산길로는 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적과 유물을 간직한 삼릉 계곡으로 방향을 잡아, 상선암 마애 대불로 불리는 높이 7m의 삼릉 계곡 마애 관음보살상, 2008년 복원된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 여래 좌상, 선각 육존불, 삼릉 계곡 마애 관음보살상 등을 만나보자.

삼릉 계곡 기슭에는 신라의 박씨 3왕인 아달라 이사금, 신덕왕, 경명왕의 무덤과 그 곁에 배동 선방사 터에서 발견된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이 있다.

경주 남산 답사의 마지막은 왕과 귀족들이 술잔을 물에 띄어 흘려보내면서 잔치를 즐기던 경주 포석정지로 끝맺는다.

14. 5·18 민주화 운동 사적지를 찾아서

[한국 민주주의의 원동력 5·18 민주화 운동]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 운동은 신군부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이후 사회 변혁의 힘찬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5·18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발단은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였다. 비상계엄 확대로 모든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리고 계엄군이 진주하였다. 1980년 5월 18일 전남 대학교 정문 앞에서 있었던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자, 이에 격분한 학생과 시민들이 항의하면서 5?18 민주화 운동은 시작되었다. 시민과 학생들은 정치 민주화 일정의 공개를 요구하며 도청 앞 광장에 모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5월 20일 저녁 시작된 계엄군의 발포 이후, 광주 시민들도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과 맞섰다. 5월 27일 새벽, 도청의 시민군이 계엄군에게 진압되면서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남긴 채 10일간의 항쟁은 끝이 났다. 계엄군의 탄압으로 5·18 민주화 운동은 좌절되었지만 이후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원동력이 되었다.

[5·18 민주화 운동 사적지]
5·18 민주화 운동의 출발지 전남 대학교 정문, 최초의 총격에 의해 시민이 사망한 장소인 광주역 광장, 5·18 민주화 운동의 심장부이자 집단 발포의 현장 금남로와 5·18 민주 광장, 양민 학살 장소 주남 마을, 시민군의 훈련 장소 광주 공원 광장, 시민 수습 위원들의 죽음의 행진 장소 농성 광장, 차량 시위의 출발지 무등 경기장 정문, 영창과 군사 재판 장소 상무대 옛터, 최후의 항쟁 장소 전남도청 옛터,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시민들이 묻힌 5·18 구묘역 등이 5·18 민주화 운동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사적지는 아니지만 국립 5·18 민주 묘지와 5·18 기념 공원도 꼭 기억해야 할 장소이자 교육의 현장이다.
5·18 민주화 운동의 상징은 민주·인권·통일이라는 광주 정신이다. 5·18 민주화 운동으로 정립된 민주·인권·통일 정신은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소중한 가치다.

15. 호남 지역의 임진왜란 전적지들을 찾아서

[임진왜란을 극복한 후방 기지, 호남]
조선 시대 호남은 물산이 풍부한 곳이어서 일본의 침탈을 쉼 없이 받았기에, 조선은 남해안 일대에 성곽을 쌓기도 하고, 섬 지역의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켜 보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육지는 관군과 의병의 힘으로 잘 막아 내어 후방 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해안 지역은 일본의 주침략로가 되었기에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막아 내는 과정에서 순천 왜교성 전투, 명량 대첩 등의 격전지가 있었다.
전라남도와 광주 지역 곳곳에는 육군과 수군의 군사 기지 내지 격전지였거나, 임진왜란 극복 과정에서 맹활약을 했던 관군과 의병을 추모하는 사당이나 기념탑이 많이 남아 있다. 사당에는 충무사, 무열사, 안동사 등 대개 사(祠)자가 붙어 있으며, 기념탑에는 임정 양란 충혼탑 등으로 이름이 되어 었다. 최근에는 이순신 장군이 일부 장수의 오해를 받아 물러났다가 백의종군하였던 길을 역사 탐방로로 만들어 장군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게 하였다.

[곳곳에 임진왜란 관련 유적이 많은 여수]
전라남도에서 임진왜란 관련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전라 좌수영이 있었던 여수, 그리고 전라 우수영이 있었던 해남과 명량 대첩이 있었던 해남·진도이다. 이곳에는 공통적으로 기념 조형물과 기념관,이순신 장군 동상과 사당이 있어 꼭 다녀와 볼만한 곳이다.
전라남도 여수의 전라 좌수영성 안에는 객사와 동헌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이 가운데 객사였던 진남관이 온전히 남아 있다. 현재의 진남관은 임진왜란 후에 세워졌다 불타고 나서 1718년(숙종 44)에 다시 세운 건물이다. 진남관은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조선 시대 지방 관아 건물 중 가장 컸다. 진남관은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학교나 관공서로도 이용되었다. 건물 앞에서 보면 바닷물 속에 성을 쌓았다는 장군도가 있다. 진남관의 유래와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편제, 무기,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을 보여 주는 임란 유물 전시관도 있다.
진남관 건너편 산마루에 있는 고소대를 향하여 가다보면 골목길 길다란 담장에 이순신 장군의 일생을 여러 장면으로 표현한 벽화를 만날 수 있다. 조금 더 올라 대문을 지나면 비각 안의 '여수 통제 이공 수군 대첩비'[보물 제571호]를 만날 수 있다. 전란이 끝난 광해군 때 이 충무공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대첩비 옆에 아담하게 서 있는 비석은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지 6년 후인 1603년에 부하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여 세운 것이다. 고소대에서 멀리 보면 진남관 윗편에 이 충무공과 휘하 장수를 모신 충민사가 있다. 이순신을 도와 함께 싸웠던 승려가 모시던 것을 나라에서 크게 다시 세웠다.
고소대를 내려와 바닷가로 내려가다 보면 골목길에서 많은 벽화를 만나게 된다. 바로 여수의 새로운 명물 ‘천사 골목’이다. 천사 골목에서 시가지 쪽으로 조금만 가면 사거리에 이순신 장군이 버텨서 남해를 바라보고 있다. 그 앞쪽에 거북선과 많은 조형물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수 해양 엑스포를 기념하면서 만든 이순신 광장이다.

16. 동학 농민 운동 - 미완의 혁명,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 전적지 마루에 가면 1963년에 세운 ‘갑오 동학 혁명 기념탑’에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가 보세 가 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 보리” 라는 노래가 새겨져 있다. 이는 그 시대 민중들의 염원, 즉 이때를 놓치면 영영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구전 민요이다.

[혁명의 불씨를 일으키다]
1892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분개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명은 1893년 11월 고부에서 사발통문을 돌려 거사 계획을 세웠다. 이를 기념하여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에 ‘동학 혁명 모의탑’이 세워졌다. 이들은 1894년 1월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다. 고부 관아 터는 현재 고부 초등학교 자리이다.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기념하여 ‘만석보 유지비’가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의 동진강 제방에 세워져 있다.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
1894년 3월에 동학 농민 운동군이 고창 무장에서 기포하였다.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뒷길에는 동학 농민 혁명 기포지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이후 부안 백산에서 봉기 하였다. 이곳이 백산성지인데 현재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동학 혁명 백산 창의비가 세워져 있다. 백산에서 죽창을 들고 흰옷을 입은 동학 농민군의 기상은 하늘을 찔렀다.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이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

[농민군 자치 조직 집강소를 설치하다]
동학 농민군은 정읍 황토현에서 관군과의 전투에서 최대의 승리를 거두고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도 큰 승리를 거둔다. 이 격전지인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에 황룡 전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승리에 힘입어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 서문을 통해 입성하게 된다. 전주 입성을 기념해서 전주 완산동 칠봉에 동학 농민군 전주 입성비가 세워져 있다.
이후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게 되자 동학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 화약’을 체결한다. 동학 농민군은 지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잘못된 정치를 자신들의 힘으로 개혁하게 된다.

[외세와 맞서다, 녹두꽃이 떨어지다]
한편 조선에 상륙한 청·일 양국 군대는 일본의 선제 공격으로 조선에서 전쟁을 일으킨다. 조선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이에 남접, 북접의 동학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전투에서 참패하고 만다. 공주 우금치 전투가 벌어진 곳에 우금치 전적지가 있다. 전봉준 장군은 순창군 피노리에서 붙잡힌다. 이곳에는 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동학 농민군이 꿈꾸었던 세상은 어떠했을까? 동학 농민군은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 대동의 세상,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다. 비록 좌절되었지만 이러한 정신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 해방 이후 민주화 운동으로 역사적 맥락을 이어 가고 있다.

17. 적을 막아라, 제주도의 방어 유적들

예나 지금이나 제주도는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 거점이다. 그래서인지 시대마다 힘쎈 세력들은 언제나 제주도에 눈독을 들여 왔다. 우리 역사에서 보면, 고려 시대의 삼별초가 몽골에 대항하는 마지막 기지로 제주도를 선택했고, 이후 삼별초를 제압한 몽골은 일본과 중국을 침략하는 기지로 제주도를 활용하였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왜구들이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을 침략하는 중간 기착점으로 활용하고자 제주도에 쳐들어 왔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이 미국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 기지로 이용하였다. 이렇듯 역사 속에서 제주도는 침략과 방어의 중요한 기지로 활용되었고, 이 때문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유적들이 현재에도 많이 남아 있다.

먼저 고려 시대 몽골 침입에 맞섰던 삼별초가 만들었던 방어 유적을 살펴보면,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과 환해장성이 있다. 항파두리성은 삼별초가 최후까지 저항하던 곳이었다. 환해장성은 섬을 둘러싼 긴 성벽이라는 뜻으로, 기록을 보면 1270년 무렵부터 원나라에 대항해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키자 처음에는 삼별초가 탐라[제주도의 옛 이름]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런데 삼별초가 탐라로 들어와서는 몽골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성을 계속 쌓았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에 이르면 환해장성은 120㎞에 가까운 성벽으로 만들어졌고 왜구의 침략 방어용으로 활용되었다.

고려 말인 1316년부터 조선 중기인 1556년까지 제주도는 왜구로부터 30여 회에 이르는 잦은 침략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천미포 왜란[1552년], 을묘왜변[1555년]과 같은 큰 사건이 있었다. 이러한 왜구들의 침입을 막으려고 제주도에는 제주읍성, 대정현성, 정의현성 등 3개의 성과 9개의 군사 행정 구역인 진, 해안가로 침입하는 적을 탐지하여 연기나 횃불로 알리려는 봉수·연대를 곳곳에 설치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미군의 침입을 막으려고 일본은 제주도 곳곳에 방어 시설을 만들어 섬 전체를 요새처럼 만들었다.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 제주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 일제 지하 벙커, 제주 셋알오름 일제 동굴 진지, 제주 송악산 외륜 일제 동굴 진지, 제주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 진지 등의 유적지가 이에 해당한다.

제주도에 있는, 시대별로 만들어진 모든 방어 유적은 당시 제주도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방어 시설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동원되었던 제주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생각하며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보고 듣고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